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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7. 3. 13:03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정부를 규탄하는 것은 한국의 역사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고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흔히 있는 일이다. 대의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민주주의의 퇴행"이라 보는 듯하다. 일면 타당하다. 나도 대의제의 뾰족한 대안이 없는 가운데,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바로 그 해에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를 "퇴행"이라고 보는 것은 그야말로 퇴행이다. 말하자면 노인네들이 인터넷에 적응을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대의제는 그 자체로 공리는 아니며 얼마든지 수정, 보완, 폐기가 가능한 여러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도구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이 일면 타당한 이유 또는 쉽게 무시해버릴 수 없는 이유는 우리는 아직 대의제를 대체할 그 어떤 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에 위기가 온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하지만 대의제를 완전히 대체할 만한 도구는 아직도 출현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현재 한국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은 대의제를 어떻게 수정 또는 보완할 것인지의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헌이라든지 아니면 국민소환제와 같은 도구들을 헌법에 추가하는 개헌이라든지의 논의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대의제를 대체할 만한 통치구조에 대한 논의가 있는지 아니면 국민소환제의 부작용에 대한 논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국 사회는 지난 20여년의 시간을 마냥 헛되이 보낸 것만은 아니다. 순전히 '정치적'으로만 보자면 민주주의가 어느정도 시스템화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대체로 보아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의 구현이 손에 잡힐 정도의 단계에 와 있다고 보고 싶다. 하지만 시민들은 "왜 한국은 서구의 발전된 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고 있다. 한국도 87년의 '시민혁명'을 통해 군사독재를 몰아냈고 헌법을 고쳤다. 이는 말하자면 서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보면 '시민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의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구현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은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혁명이 피를 부른다는 것은 혁명의 주체들이 흘리는 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혁명의 객체가 흘리는 피가 바로 혁명을 혁명으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한국의 '시민혁명'은 혁명의 객체가 피를 흘리지 않았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혁명의 객체들은 여전히 "국민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다.

군사독재시절의 정부에 의한 물리적 폭력(집회와 시위에 대한 경찰력의 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시민들이 마치 이를 봄소풍 나오듯이 나와서 즐기는 이유는 어디 있는지 수수께끼이다. 시민들이 정치적인 주장을 하며 거리로 나온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이라는 거다. 하지만 정작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전혀 비정상적이지 않고 대중가수의 콘서트를 보러온 사람들처럼 아이들의 손을 잡고 혹은 연인의 손을 잡고 웃으면서 축제를 즐기고 있다. 이건 한국 사회가 지난 시절의 경험에 의해 체득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이를 알면서도 왜곡하고 있고 정부는 아직까지 이러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 것같다.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좌파이거나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의 선동에 의하거나 전문 "데모꾼"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이없어 보여도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가 상상하지 못하는 변화는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이러한 변화가 '월드컵 광장'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월드컵이전에 시민들은 광장은 두려움의 장소였지만 월드컵이후의 광장은 축제의 장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의 방향에서 보아야 하는데 광장의 순기능과 역기능의 관점이다. 순기능이야 여기서 재론하지 않아도 그 동안 수많은 찬사가 있어왔으니 충분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주위의 시선과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정을 외부에 표출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월드컵 광장은 매우 중대한 역기능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집단적인 감정의 표출은 그 자체로 선이라 생각하는 행태가 생겨났다는 것이고 여기서 집단적인 폭력이 자연스럽게 용인되는 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한 예가 독도문제나 황우석문제, 아프간 피랍사건 그리고 '디워'문제에서 전형적 나타났다.

촛불집회의 역사적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가지 의구심을 가졌던 것도 바로 이 역기능의 폐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촛불집회에 반대하는 생각이 다른 시민에 대한 집단적인 폭력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우선 정선희나 황정민에 대한 폭력에서 그렇고, 침소봉대일 수도 있겠으나 시민들의 의식 속에는 매우 위험한 가치관이 도사리고 있는 듯 보인다. 다음에 인용하는 댓글에서도 그러한 가치관의 일단이 보인다. 이는 경향신문의 기사에 대한 댓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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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댓글은 짧은 세 문장으로 내가 우려하는 바를 종합적으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나의 우려는 기우일 수도 있고 성급한 일반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심을 거두기에는 너무 적나라하게 그 위험한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관으로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대다수가 아닐 수도 있다. 또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장이나 역사에서의 역할이 폄훼될 수는 없다. 단지 이러한 가치관은 그 촛불이 지향하는 목적의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촛불집회가 지향하는 목적이 바로 이러한 위험한 가치관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원래 글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대의제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정리하고 싶은 의도였지만 이상하게 흘러 엉뚱한 문제를 부각시키는 글이 되었다. 대의제에 대한 문제는 차후에 다시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깊이 고민해야할 문제이므로 성급한 판단은 보류해 둔다. 조만간 이 글에서 제기한 문제제기를 완성된 글로 올릴 수 있기를 바라지만 과연... 좀 더 공부와 고민이 필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