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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22. 08:04

내가 볼 때, <디 워>를 옹호하거나 또는 옹호하지는 않고 진중권만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들은 못 느끼지만) 실은 <디 워>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부류의 지식인들의 사고구조는 단 한 가지이다.

"<디 워> 재미있게 봤는데... 그럼 나도 '영구'야?"


그들도 분명히 <디 워>를 둘러싼 사회현상이, 지난 2002년 월드컵 이후에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생길 때마다 등장하는 '병리적'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본다. 만약 그게 안 보인다면 (무시하는 게 절대 아니고) 최소한 대화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다. 예가 적절한지는 판단이 잘 안 서지만, 파시스트와 아나키스트의 간극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정도로 엄청난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토론을 통한 설득은 불가능하고, 전체주의 제도하에서는 제거만이 방법이고 민주주의 제도하에서는 표 대결만이 방법이다. 이런 가치관의 차이는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이고 '대화와 타협'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통합의 정치'가 가능하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가 각종의 제도로 틀이 짜여지고 제도를 통해 운용되는 것이다.


대다수의 <디 워>를 옹호하는 편에 서 있는 지식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그토록 조롱하고 비아냥댔던 사람들의 부류에 속하게 되는 치욕을 당해야 하니까, 기를 쓰고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디 워>가 재미있었던 것은 그들이 '본능적으로' 느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 본능적으로 느낀 '재미'는 이론적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본능적으로 느낀 '재미'는, 그들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그토록 조롱하고 비아냥댔던 가치관을 이성적으로는 반대할지라도 본능적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동감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걸 너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모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개조'에는 교육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내 경험을 얘기해보자면, 2002년 월드컵 때 대구에서 열린 미국과의 경기를 구경하러 서울서부터 간 적이 있다. 경기가 시작할 때, 다들 알다시피,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붉은 악마들은 대형 태극기를 관중석에 펼친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이 엄청난 규모의 태극기가 펄럭이니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원래 눈물이 좀 메마른 사람이라 '촉촉함'으로 그쳤지만 매우 열정적인 내 친구는 비장한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것'마냥' 그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본능적으로' 이런 감정을 갖고 있다.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그걸 알고 고치면 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런 감정들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폭력으로 변태하는 것만 경계하면 되는 것이다.


<디 워>에서 본능적으로 느낀 재미는 2002년 월드컵 때 광장에서 느낀 그 뜨거움과 온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맥상통한다. 같은 뿌리를 가진 감정이다. 왜 '황우석 때'는 이상 현상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은가? 그게 바로 황우석 때와 <디 워>의 현상의 다른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차이는 바로 영화를 직접보고 자신이 그 '재미'를 느꼈다는 데에서 온다. <디 워>를 옹호하는 지식인들에 국한된 문제이지만, 황우석 때는 자신이 직접 연구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연구를 위해 기부를 한 것도 아니고, 심정적인 지지를 보낸 것 외에는, 아무런 '내부적'인 참여가 없었지만 <디 워>는 자신이 '영화를 본다'는 행위로 참여를 한 것이기에 '좀'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 때는 제3자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내부자'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현상을 진단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황우석의 거짓말이 밝혀져 외부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지만, '내부자'인, 휘하의 연구원들은 아직도 황우석과 '연구'를 하고 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보이는 당연한 현상이 일단 '내부자'의 입장이 되면 절대로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현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훈련이 된 다른 지식인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인도 오류에 빠진다. 당연하다.


애초에, 이런 감정적인 요인으로 출발한 논쟁이므로 논리적인 토론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종교적인 신앙을 가진 자와 그 신앙인이 가진 핵심적인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자 사이에 논리적으로 토론이 가능하던가? <디 워>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사고체계는 종교적인 신앙과 매우 유사한 핵심적인 감정이 숨어있다. 종교학의 고전인 오토(Rudolf Otto)의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를 보면, 누미뇌제Numinöse(누멘Numen적인 것)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이게 모든 신앙의 개념 징표이다. 바로 이 누미뇌제를 <디 워>의 옹호자들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렇다. 이 '두려움의 신비(mysterium tremendum)'는 논리와 합리가 통하는 영역이 아니다. 이런 감정은 이성적인 사유思惟로 획득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다. 주로 이런 누미뇌제는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확고하게 획득하게 되는데 '우리의 누미뇌제'는 한국 사회에서 교육받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없음에도 한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모두가 이런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이성과 합리로 설명이 불가능한 '두려움의 신비'를 갖게 되는 것이다. 파시즘의 주요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가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이고 누미뇌제가 합리주의에 반하는 개념이라는 점과 이 개념의 등장한 시대가 파시즘이 태동하던 시대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이른바 '디빠'들이 대상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 '빠'가 되어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이 병리적인 현상은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정확하게 통계를 낼 수는 없지만, 이 병리적 현상에 대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노빠'는 '황빠'이고 '황빠'는 '디빠'라고 보는 경향이 있고 나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노빠'를 증오하지만 '디빠'인 사람이 있고 '황빠'를 증오하지만 '디빠'인 사람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앞서 지적한 그 구조에 있다. 각자의 이슈에 대한 관심과 참여의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시즘의 '징후'가 보인다고 하지 파시즘이다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파시즘이 등장하려면 경제적인 요인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바로 이 경제적인 요인이 이 모든 '빠'들의 에너지를 한 곳에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모두의 관심사이고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문제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앞으로의 한국 경제 상황이 파시즘을 불러오는 상황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슈에서 '빠'였던 '선량한 대중'이 모여 하나의 이슈에서 '빠'가 되면 그게 바로 파시즘이다. 이게 파시즘을 무슨 "전가의 보도"인 양 휘두르는 사람들의 걱정이고 "남발되어서는 곤란한 파시즘의 개념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는 이유이다.


<디 워>가 <지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잠도 덜 깬 아침에 주절거려 본다.



이 글은 '노빠'는 아닌데 '디빠'이고 '황빠'는 아닌데 '디빠'인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빠'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싫고 경계하지만 달리 조어造語를 할 능력은 안 되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이라는 것을 양해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