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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11. 08:49
1. '문화소비집단'으로서의 대중(네티즌)이 비평을 소비하는 형태

대중이 비평을 소비하는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그냥 무시하는 것이다. 비평을 읽어봤는데 공감을 못 하겠으면 그냥 '무식한...이런 게 무슨 비평가라고...”하면서 무시한다. 두 번째는 비평가의 논리를 논리로 비판하는 것이다. 비평가급의 전문지식이 있는 네티즌들이 하는 형식이다. 세 번째는 '니가 뭔데 우릴 가르치냐'식의 막무가내 형태인데, 논리는 없고 '그래 너 잘났다. 왜 가르치려 드냐. 날 무시하냐' 등 감정적인 배설을 주로 한다.

2. 과거와 현재의 소비 형태의 차이

인터넷이 없어서 정보 공유가 어렵던 시절에는 문화의 소비도 비평의 소비도 단면적이었다. 언론을 통해 접하는 비평을 위에서 본 세 가지의 형식 중 첫 번째의 방식만으로 소비했다. 아니면 그저 주변의 지인들끼리 의견을 나누는 정도였다. 이에 대해서는 a77ila 님의 “디워현상”에서 일부 인용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디워 이야기가 나오고 무슨 이야기가 나오고 무슨 빠가 나오고 하면 사람들이 요즘들어 갑자기 미쳐서 날뛰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게 과연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도 일종의 롱테일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과거에는 큰 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자기네들끼리 속삭이다가 갑자기 인터넷과 블로그와 댓글과 이런 새로워진 공론의 장이 생기자, 갑자기 공론의 롱테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옛날과는 달리 사람들이 갑자기 과격해졌다거나 또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 내지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했던 생각을 요즘들어서 자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지 옛날에는 그런 이야기들을 내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렇듯 대중의 소비 형태는 과거와는 달라졌다. 인터넷이라는 매개로 비로소 위의 세 형태 중 나머지 두 가지의 형태도 가능해진 것이다.  이른바 web 2.0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3. <디 워>, 무엇이 문제인가?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디 워>를 둘러싼 논란 중에서 한 부분인 비평에 대한 것만을 다룬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블로거들이 많이 언급했기 때문에 동어반복에 가까운 글을 또 올리는 것은 공해에 해당한다는 생각으로 접는다. 이에 대해서는  verite 님의 "문제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다."와 ozzyz 님의 "디 워 광풍" 등등의 글을 참고하시라. 또한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내가 쓴 "따로 또 같이...""'성공신화' 그 슬픈 자화상"도 참고 바란다.]

위에서 본 첫 번째의 소비 형태는 전혀 문제가 없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경우이다.  먼저 두 번째의 경우를 보면, 이 경우에도 세 번째의 경우와는 달리 직접적인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전문 비평가의 비평에 대해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논리적으로 비판을 한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a77ila 님의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비평에 대한 비판이 소비되는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이 비판은 '본의와는 다르게' 확대 재생산이 되어, 가장 문제인 세 번째의 경우를 증폭시키고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형태의 소비가 바람직하지 못 하다거나 지양되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올바른 소비 형태라고 할 것이다. 문제는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째의 경우와 결합되는 경우에 나타난다. 말하자면 변종내지 변태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인용으로 인한 왜곡까지 일어나면 그 폐해는 심각해진다.

세 번째의 경우가 문제인데, 이 경우가 요즘의 <디 워>를 둘러싼 이상현상의 핵심이다. 말하자면 '반지성주의'의 발현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가장 우려할 만한 게 '비평가 니가 뭔데 날 가르치냐', '날 무시하냐?' 등의 반응인데 이는 말하자면, 비평가를 직접적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실은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전문가라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지식인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대신 공부한 사람이 나에게 그 '대신 공부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것'을 존재이유로 한다. 내가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지식이 있을 수 있지만, 다른 모든 분야에 대해서도 전문지식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분야에 대해서는 해당 전문가의 지식을 빌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전문가의 존재이유고 지식인의 존재이유다. 그게 아니고는 개인적으로는 지적허영을 채우는 일종의 자위가 되겠지만 최소한 사회적으로는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 전문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좀 과장되게 정의하자면, 전문가는 비전문가를 가르치는 것을 존재이유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비평에 대해 논리적 비판을 하는 것을 비평가가 다시 비판하는 식의 소비 형태는 매우 바람직하다. 비평에 대한 비판이 비평가(라는 전문가)가 봤을 때 유의미하다고 판단이 서면 그에 대한 비판을 다시 하거나 수용하거나, 어떤 경우에 해당하든간에,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 될 것이다. 단지 저 잘났다고 주장하는 지식의 경연장이 되는 대신에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검토를 요하는 점이 있다. 예컨대, 변호사에게 법을 매개로한 비판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대부분의 경우 유의미한 비판이 될 확률은 없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에게 경제학적 초보 지식으로 비판을 한다면 경제학자가 할 말은 한 가지이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냐?" 철학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전문자격(학위가 됐든 변호사 자격이 됐든)에 권위를 과도하게 부여하여 전문가 아닌 자는 찍소리도 하지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전문가라면 최소한 오랜기간 그 전문분야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을 거친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사이비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해당 분야의 책을 몇 권 읽었다고 해서 전문가와 동급이 될 수는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일천한 지식으로 비판을 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전문가는 그 일천한 지식을 기반으로 한 비판을 무시(무관심)하거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지식 수준에서 비판이 가능하지만 그 비판이  모두 전문가에게 의미가 있는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만약에 그 비판에 오류가 존재하고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 생산적인 토론에 도움이 된다면 전문가는 그에 대해 지적할 수 있고 또 지적해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진중권에 대해 '니가 뭔데 영화비평을 하느냐? 영화 전문가가 아니지 않느냐.'는 비판은 옳을 '수' 있다, 그는 문화에 대한 비평을 하지만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체계적인 훈련이 되어있다고는 보기 힘들다. 따라서 그의 비평에 대해 영화 지식의 얕음을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지만 '니가 뭔데 날 가르치느냐.'나 '말하는 태도가 싸가지가 없다.'나 '대화하는 법부터 다시 배우라.'는 등의 비난(비판이 아니다.)은 올바르지 못하다. 거기다가 이런 비난이 개별적으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난이 집단적으로,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경우에는 진단을 요하는 사회현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현재 일어나는 이 이상현상을 진단하려고 드는 것이다.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권위에 굴복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도전할 수 없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깨지라고 있는 것이지 부정하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깨지기 전에는 최소한 존중은 필요하다. 그것이 다양화된 사회의 분업 또는 협업에 기초한 운영체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공동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문가의 전문지식을 수용하느냐 무시하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렸다는 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테고 말이다.

4. 내가 파시스트라고? (덧글에 갈음하여)

현재의 이 이상현상을 파시즘적 현상으로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다면, <디 워>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른바 '심빠', '디빠'가 모두 파시스트일까? 많은 '심빠'들이, 예전에는 '황빠'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파시즘적 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저항이 심하다. 그건 파시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영화나 심형래라는 개인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내가 그럼 히틀러냐?'일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독일을 만든 것은 바로 '심빠' 같은 선량한 대중이다. 파시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고 내 이웃이 만드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그 거대하고 폭력적인 에너지의 원천인 개인이 자신이 그 힘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는 데 있다. 그 폭력의 구성 분자가 내 선량한 이웃이라는 점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파시즘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오바'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제 상황은 무르익었고 '카리스마'의 등장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