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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6. 14:38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것은 법과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시스템'에 의해 굴러가는 국가가 덜 부패하고 더 상식적이게 마련이다. (얼마 전에 이 '시스템' 주장하시던 양반 징역 8개월 맞으셨던데, 어떠신가 궁금하네.) 한국에서는 이 시스템에 의한 정부가 아직도 요원한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왜 자랑스러워 하는지는 모르지만, 옛날부터 줄기차게 우리의 자랑이라는 사람 사이의 '정'이나 '예의'에 있다고 나는 강하게 의심한다. 뭔가 시스템에 의한 운용이 자리 잡을라치면 '비인간적'이라는 둥,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자연스런 현상인 갈등의 표출도 '극단적'이라거나 '국론분열'이라는 둥으로 무력화된다. 여기에는 '중용의 도'도 단단히 한 몫을 한다.


나는 시스템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게 바람직하다고 보지도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제대로된 시스템이라도 한 번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다. 이는 마치 시장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시장주의라도 제대로 하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장의 논리를 밤낮 주장하면서 정작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독과점 규제 등은 사회주의 정책이며 반시장정책이라고 선동해대는 인간들을 보면 그렇다. 이는 고스란히 법과 제도를 보는 방식에도 옮아가는데, 밤낮 '법치주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이 정작 "예의" 운운 하면서 법과 제도 자체를 망가뜨리려 하고 있다.


현 검찰총장 임기는 11월 23일 끝나고 17대 대통령 선거일은 12월 19일로 그 기간은 26일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그 정도 기간은 현 대검 차장이 총장 代行대행으로 검찰을 이끌도록 하고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노 대통령과 다음 대통령이 상의해 검찰총장 후임자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이 지금 대통령 후보라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답은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정치의 순리고 물러나는 대통령이 차려야 할 예의다. (오늘자 조선일보의 사설)


현 정부가 법과 제도를 무너뜨리고 법치주의를 무너뜨린다고 그렇게 주장하던 조선일보가 청와대가 법대로 한다고 하니 "순리"와 "예의"를 찾는다. 애초에, 검찰총장 임기를 만들 때 아무 고민도 없이 그냥 임기제로 하면 '중립적'일 것 같아서 도입한 것이라는 게 그냥 드러난다. 사실 검찰은 행정부에 속한 권력이다. 대통령이 좌지우지하는 기관이라는 뜻이다. 이게 정상적이다. 그러나 한국은 과거 역사를 통해서 검찰이 권력의 시녀일 때에는 어떠한 불행이 닥치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검찰이 정치권력에서 중립적이기를 바란다. 이게 중립을 외치면서 임기제를 도입한 이유이다. 하지만 이게 웃기는 것이다. 행정부와는 전혀 별개의 중립적 헌법기관인 법원도 제도적으로 중립이 보장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역사의 재앙'적인 사건들이 생긴 것은 아니다. 검찰도 마찬가지이다. 결국은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운용하는 시스템과 사회인식이 걸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웃기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나, 이건 정말 너무 웃긴다. 다음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임명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은 그들이 그토록 거품을 물고 주장하던 검찰의 중립과는 거리가 먼 얘기이다. 대통령의 의중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 총장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검찰이 정치권력에서 중립적이라면 누가 임명하든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또 임기가 석 달 남은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는 하는 것은 순리에도 어긋나고 예의도 아니라는데, 그럼 다섯 달 남은 대통령은? 열 달 남은 대통령은? 이게 이런 식이다. 그래서 법과 제도가 있는 것이다. 검찰이 대통령에 속한 권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임기제도를 없애는 것이 맞고 중립적인 권력으로 만들고 싶다면 철저하게 임기제로 유지하는 게 맞다. 치안과 공소제기는 전통적으로 행정부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시대에 맞춰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 이런 권력구조의 문제도 그렇다. 어떤 제도가 옳으냐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이런 게 국가의 중요한 정책으로 국민투표가 필요한 것이다. 하긴 검찰을 행정부에서 독립시키려면 헌법의 개정이 필요할 테니 당연히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겠지만.


만약 조선일보가 전자前者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했듯이 법의 개정을 통해야 한다. 그걸 무시하고 순리와 예의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통령이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정치인이라는 것은 현대정치의 상식임에도 법에 '입 다물라'고 되어 있다고 법치주의를 무너뜨리는 대통령이라고 비난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물론 나는 법에 '입 다물라'로 되어 있다고 해석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만약 후자를 주장하는 것이라면,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이명박에게 권력을 남김없이 모조리 넘겨주고 싶어 안달을 안 해도 된다. 노무현이 임명할 검찰총장이나 대통령이 된다면 이명박이 임명할 검찰총장이나 별로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등장하는 '특검'이라는 자랑스런 전통이 있지 않은가.


남북정상회담도 다음 대통령에게 넘기고 주요 기관의 인사도 다음 대통령에게 넘기고... 이러한 사고의 근저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도사리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다가 큰코다친다. 대통령이 아무리 밉고 싫어도 그가 행사하는 권력까지 거둬들이자는 것은 민주주의 근본을 훼손하는 것이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 지긋지긋한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그러니 제발 마지막까지 참아달라. 그 꼴을 도저히 못 견디겠다면 차라리 하야 선동을 하라. 엉뚱한 데 "예의" 갖다 붙이지 말고. 차기 대통령에 대한 예의보다 먼저 현직 대통령에 대한 예의 좀 지켜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