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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13. 22:03

[뒤늦게 <디 워>에 대한 글을 올리는 것은 이를 둘러싼 논쟁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라 논쟁들을 '구경'하다보니 왜 <디 워>에서 민족주의가 문제이고 파시즘이 문제인지 모르는(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지..)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도 하거니와 내 나름대로도 정리할 필요가 있어서이다. 민족주의에 국한하여 언급한다.]


<디 워>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논점 중의 하나가 민족주의이다. 나는 민족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파시즘의 위험은 우리의 사회와 제도가 아무리 발전하여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이고 보면, <디 워>관련 논쟁를 보면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도 바로 이 민족주의와 연결된 파시즘이다. 웹상에서 이루어지는 <디 워>관련 민족주의 논쟁의 주요부분은 영화에 삽입된 '아리랑'이 민족주의 코드라거나 영화 배급사의 민족주의/애국주의 마케팅이 문제라는 데 있다. 이런 관점은 <디 워>관련 민족주의 논쟁에서 일면만을 다루는 것이다. <디 워>관련 논쟁에서 민족주의를 언급하는 의견의 중심은 이른바 '대중'에게 내재한 민족감정과 이 감정의 외부적 집단적 발로인 민족주의에 있고 이 민족주의가 어떻게 파시즘으로 발전하는가에 있다. '대중'의 민족주의를 '촉발'하는 배급사의 마케팅을 비판하는 데 중심이 있다거나 이 마케팅에 놀아나는 '대중'을 비난하는 데 중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파시즘의 작동메카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뜬금없이 파시즘이냐"는 소리가 나오고 "황우석 때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파시즘은 이 민족주의의 연장선상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발로로 네티즌이 집단적으로 폭력화한 지점에서 파시즘이 언급되는 것이다. 내가 민족주의를 경계하는 것은 파시즘과 연결되기 때문이고 <디 워>를 둘러싼 현상은 이미 파시즘의 징후를 보여주기 때문에 우려하는 것이다. 만약 '기껏 웹상에서 벌어지는 일부 현상에서 호들갑스럽게 파시즘을 언급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배급사의 민족주의 마케팅이 하루 이틀 일이냐는 의견에서 드는 주요 작품이 바로 <한반도>이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민족주의 마케팅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고 또 작품 자체의 내용도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디 워>와 같이, 이런 논쟁이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물론 평론가들은 이때에도 이런 마케팅의 위험성과 작품 내용의 '허접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디 워>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지만) 지금처럼 벌떼같이 일어나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마케팅이 얼마나 대대적으로(주로 비용의 문제이다.) 이루어졌는가에 있을까? 아니면,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디 워>만 못해서 그럴까? 둘 다 일정부분 이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작품의 성격에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한반도>는 그야말로 '내수용'이었다. 우리끼리 보고 일본에 대한, 중국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는 그런 성격의 영화였던 것이다. 당시에도 세계 민족주의의 세 마리 용인 한, 중, 일은 온통 민족주의관련 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런 시류를 본 강우석이 그야말로 시장의 논리로 만든 저질 영화였을 뿐이다. 하지만 <디 워>는 성격부터가 다르다. 이건 내수용이라기보다는 말그대로 '수출용', 좀 더 본질을 말하면, 전쟁의 도구인 총, 대포, 미사일 정도의 성격을 가지는 작품이다. 헐리우드라는 거대한 성을 깨는 대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의 그 누구도 하지 못한, 그래서 더욱더 민족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 되는 우리의 군대인 것이다. 우리끼리 보고 마는 <한반도>와는 다르게, 헐리우드를 쳐들어갈 수 있게 우리가 힘을 실어줘야 하는 우리의 병사가 되는 것이다. 민족주의가 외부의 세력과 맞닥뜨리게 되면 그 힘은 외부를 향하든 내부를 향하든 폭발하게 된다.


"우리가 마케팅에 놀아나는 바보냐?"는 것이 <디 워>를 '숭배'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불만이다. "우리는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아이들의 손을 잡고 보고 온 선량한 문화소비자일 뿐인데 왜 마케팅에 놀아난 '폭도', '파쇼'로 모느냐."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보면 아닌 게 맞는데 집단적으로 보면 바보인 게 맞다. 민족주의의 기본이 되는 민족감정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옹호하듯이, 좀 확대된 가정인 '민족공동체'를 사랑하고 옹호하는 것은 '어찌보면'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게 문제냐 하면, 이런 순수하고 본능적일 수 있는 감정은 그 자체로 남아있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면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민족감정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외부적 집단적으로 나타나는 민족감정은 필연적으로 민족주의로 발전하게 마련이고, 또 나아가 파시즘으로 발현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가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잘못을 두 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내부적 개별적 감정이 외부적 집단적인 민족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마케팅의 기여가 나타난다. 개개인이 가진 순수한 이른바 민족감정이 왜 요즘 이렇게 외부적 집단적으로 발현되어 민족주의가 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정부, 언론, 자본의 마케팅 때문이다.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는 지지를 얻기 위한 마케팅을, 언론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여 광고를 얻기 위한 마케팅을, 자본은 상품을 팔기 위한 마케팅을 한다. 이 삼각파도는 각각의 속도, 방향으로, 또 각각의 높이에서 정신없이 몰아친다(삼각파도풀pool을 생각하면 쉽다.). 이 사나운 삼각파도에 일단 휩쓸리게 되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파도에 저항하면 할수록 더 물을 먹게 된다.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정부, 언론, 자본의 삼각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을 위해,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개개인의 내부에 간직한 이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이런 마케팅이 누적되어, 내면에만 있어야 하고 개별적으로만 나타나야 할, 이 자연스러운 감정이 외부적 집단적인 민족주의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케팅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지 "얼라들"이 마케팅에 놀아나는 바보들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누구도 준비없이 이 마케팅의 삼각파도를 만나면 휩쓸리는 수밖에 없다.


이 집단화된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폭발하는 데는 경제적인 문제가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 요즘 한국의 경제적 현실은 이 민족주의가 파시즘으로 발현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관점도 많고, 나도 이런 관점에 찬성하는 입장이며, 그래서 민족주의를 '과도하게' 경계하는 측면이 있다.


지식인의 역할은, 이런 사회현상의 구성분자가 되어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대중'들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있다고 믿는다. 내가 바보이고 무능력해서 "똑똑하고 잘나신" 지식인들에게 배우는 것은 아니다. 이건 일종의 분업이라고 보면 된다. 의사에게 수술을 맡기듯이, 판사에게 재판을 맡기듯이, 내가 구성분자가 된 사회현상의 진단을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다. (지식인이 아닌) 우리 자신도 사회현상을 진단하고 처방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기 위해 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 방법이 지식인의 진단과 처방이 담겨있는 책을 읽는 것이다. 지식인을 내가 존경해야 할 대상,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면, 지식인들의 지식(진단과 처방)만을 취하면 되지, '훌륭한 인품까지 갖춰 나의 표상이 되어주세요.'류()는 그야말로 '계몽주의 시대'의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