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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8. 5. 11:56

예전에 MBC에서 하던 <성공시대>라는 교양프로가 있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우리 시대의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방식을 보여주는 프로인데 아주 인기가 높은 프로였다. 링크를 걸어놓은 페이지에 가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주인공인지 알 수 있다. 개중에는 정말 훌륭한 인품과 업적으로 모든이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분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고싶은 말은 이 분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프로에는 거의 공통적으로 나오는 성공공식이 있다. 시대적, 개인적 역경을 딛고 일어서서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마침내 이뤄내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공식이다. 우리가 갈채를 보냈던 성공은 이랬다. 누구에 대한 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경영자가 일본의 기업에 가서 산업스파이 짓을 해서 기어이 개발에 성공하고 마침내 그 기술을 갖고있던 일본 기업을 이긴다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너무 충격적으로 봤기 때문에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지만 대개의 에피소드가 이런 식이었다. 이 산업스파이 짓은 방송에서는 불굴의 노력으로 포장됐다. 일본 기업에서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기술을 계속 보여달라고 억지를 부리다가 결국은 숨어서 기어이 보고 온다. 이건 우리가 배워야 할 불굴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그냥 절도일 뿐이다. 이런 걸 우리는 본받아야 할 성공이라 불렀다. 아직도 이런 가치관은 노골적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너무나 못살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을 해야 했으며 서양에서 인정받는 것을 최고의 성공으로 알았다. 이것이 성장 신화에 목매달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던 박정희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일본을 '경제동물'이라 비웃었던 우리는 더 천박한 '경제동물'이 되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가치관은 얼마나 성장에 효율적인가로 획일화되었고 주위를 둘러보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런 가치관으로 지금까지 버텨왔다. 벌써 극복됐어야 할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지 못하고 아직도 우리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있다. 우리는 이 지난 시절의 가치관으로 문화를 바라보고 종교도 바라본다. 종교단체의 선교도 성장의 가치관으로 투영해 보고 문화적인 가치는 산업화되어 천박해졌다. 문화를 산업으로서의 가치로'만' 평가한다. 세계의 어떤 자본주의도 문화를 산업으로서의 가치로'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천박한 자본주의적 문화의 대명사인 미국에서조차 말이다.


오래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무슨 나쁜일이라도 저지르면 우리들이 본능적으로 내뱉는 말이 있다. '나라 망신'이라는 말이다. 어떤 개인이 잘못을 하면 우리는 단체로서의 나라가 망신스럽고 그래서 전혀 관련없는 나도 망신스러워해야 한다. 예를들어 얼마 전에 있었던 '버지니아 총기난사 사건'에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희생자인 미국인들에게 미안해야 했고 집단적으로 수치스러워해야 했다. 지난 시절 압축적인 성장을 위해서 개인의 개성은 철저하게 무시되었고 이를 위해 전체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인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등치되었다. 개인주의는 죄악시되었다. 다양한 개인을 주장하는 것은 전체에 대한 반역이었고 용납되지 않았다. 개인은 없고 전체만이 존재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한민족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린' 위대한 일이 되었고 비단 스포츠 분야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분야에서도 세계에서 인정받는 것은 우리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되었다. 절대로 그 개인이 우수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개인은 한민족이므로 집단적으로 우수한 데에 포함되었다. 만약 이 논리대로라면 미국인들이 가장 우수한 사람들인가? 미국은 다민족이니 가장 많은 인구인 백인,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인 독일계가 그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인가?


내가 왜 한가한 일요일 오전에 성장주의, 전체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한데 뭉뚱그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배설하냐면 영화 <디 워>에 대해 ozzyz 님이 쓴 글 "디 워 광풍"에 달린 댓글들을 봐서이다. 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써갈긴 댓글에 대해서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서글픈 생각이 든 것은 굉장히 진지하고 예의 바르게 노력을 들여 쓴 댓글들이었다. 나는 그 댓글들을 보면서 위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노무현의 표현대로 하면, 아직도 "유신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들을 바라보는 것은 박제된 짐승을 바라보는 것처럼 서글프다.


덧글1

원래는 아프간 사건과 <디 워> 광풍을 한데 묶어 파시즘으로 엮어버리는 전투적인 글을 쓰고자 했으나 위에 언급한 댓글들을 보면서 전투적이 될 수 없었고 서글퍼졌다. 그나마도 글을 마치지 못했다. 갑자기 무기력해져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올린다. 내 글이야 언제나 미완성이니 별 상관은 없으리라 본다. 본디 내 글에서 논리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특히나 이 글은 너무나 감정적으로 쓴 글이므로 논리적인 비판은 사절이다. 내 글쓰기의 가장 큰 미덕이 논리비약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길...

기왕에 쓴 글이니 한마디만 더 하자면, 나는 <디 워>를 보지 않았다. 그러니 영화가 잘됐는지 못됐는지 그 완성도는 전혀 논점이 아니다. 스토리가 빈약하다느니 컴퓨터그래픽이 훌륭하다느니 하는 것은 전혀 논점이 아니다. 그런 건 영화를 본 관객이나 평론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광풍은 영화와는 관계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와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영화를 옹호하건 비판하건 정치적이지 않은 문제는 전혀 관심의 밖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황우석 사건과 왜 완벽하게 동일한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은 제발 부탁하건대 여기에 흔적일랑 남기지 말아달라.

파시즘의 무서운 점은 그 집단의 잔인한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집단의 구성원인 개인은 너무나 온건하고 선량한 시민이라는 데 있다. 그 집단의 구성원은 바로 나의 선량한 이웃이다.


덧글2 (2007.8.5. 13:22에 추가합니다.)

이렇게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요?

http://adman.tistory.com/47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덧글3 (2007.8.6. 02:00에 추가합니다.)

http://adman.tistory.com/48

가만보니 고도의 풍자로 보입니다. 풍자가 맞다면 님!!! 왕입니다요.^^ 고수를 미쳐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