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로 운용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는 여러 제도로 구현이 되는데 이러한 제도들도 모두 다수결의 원리에 의해 운용된다. 일단 국회는 말할 것도 없이 다수결의 원리가 가장 중요한 원리로 적용되는 권력이다. 행정부는 좀 다른데 대통령이 수반으로서 모든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고 권한을 행사한다. 이는 대통령제를 택한 국가의 특징인데 행정이 대통령으로 일원화돼 있다. 하지만 행정부 내의 여러 기관들은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를 취한다. 각종 위원회는 물론 위원들의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한다.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의 독립적인 권력들은 예외없이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한다.
이렇게 다수결이 각 제도의 근본 원리가 된 것은 민주주의에서는 당연하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기본으로 한다. 의견이 다양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또 전제로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양성과 갈등으로 이루어진 이념이다. 이런 갈등을 이겨내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다수결이라고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준다. 물론 이 다수결에는 전제가 있다. 다수와 소수의 위치가 교체가 가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수결은 전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될 수가 없다. 사회는 이렇게 모든 의견에 있어서 다수와 소수의 대립이 존재한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권력기관들의 구성도 당연히 다수파와 소수파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다수파의 의견이 그 기관의 의견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파가 다수의 지위를 점하게 되면 기관의 의견은 바뀌게 되는데 그래서 대법원 등의 판례변경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법원 뿐만 아니라 헌법재판소, 감사원, 선거관리위원회 등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에서도 다수파에 의해 법이 개정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국회의 의견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기관들의 구성은 매우 중요한 선언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정한 이슈에 대해 의견이 변할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구성은 당연히 다수파와 소수파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함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를 보자면 대통령, 국회, 대법원이 각 3인씩 재판관을 지명한다. 이런식으로 각 기관이 도식적으로 3분하여 지명권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거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다수파와 소수파의 배분적 구성이 당연히 왜곡되어 나타날 위험이 있으므로 제도의 개선이 요구된다. 엄청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의견대립이 해결되는 과정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헌법재판소와 관련된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한다. 먼저 언급할 사건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위헌 사건'이다. 잘알다시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고 국회에서 통과된 수도이전특별법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8대 1로 위헌결정을 한 사건이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논점은 이 정책의 당부는 아니다. 이 법의 위헌여부를 결정한 재판관의 수가 문제인데, 사회에서는 논란이 많았던 문제이고 또한 충청도민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정책이고 대통령의 공약으로, 분명히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반대하는 정책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8대 1은 이해하기가 힘든 결과이다. 이상적인 민주사회라면 정부에서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찬반비율은 5대 5를 기본으로 약간의 아래위 변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이념과 무관한 것은 존재하기가 힘들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거를 통해 정부의 책임자를 선출하는 이유인데 어떤 정책이든 이념을 기반으로 바라볼 때 크게 좌우의 의견대립이 있다. 물론 수도이전의 경우에는 좌우의 이념적인 문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데 이런 문제의 경우에도 다수와 소수의 의견대립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음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 사건'이다 링크해 놓은 기사를 보면 그를 헌재소장으로 지명한 것에 대한 의견대립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인데 반대하는 논거야 어찌됐든 재판관의 정치적인 가치관과 관계없이 그냥 '무난한'인사에게 찬성표를 던지던 국회의원들이 정치적 성향을 문제삼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일단 민주적 절차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라면 이 지명이 결국은 좌절됐다는 데에 있다. 전효숙의 정치적인 성향은 어떤 위치에 있을까? 잘 알 수는 없지만 그의 판결등으로 봤을 때 당연히 그는 보수적인 인사이고 우파적인 성향을 가졌다. 하지만 극우라고 보기는 어렵고 좀 더 왼쪽에 가까운 우파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좌파 입장에서 본다면 전효숙은 우파지만 여자이고 이른바 사시기수 서열로 승진하던 관행을 깨는 전향적인 인사(人事)이므로 찬성했을 것이고 극우파의 입장에서 본다면 헌재소장을 좌파인사가 차지하면 헌법이 무너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단 이 지명이 좌절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극우파의 세력이 커서 그렇다고 볼 수 있고 그들의 대변인인 조선일보가 그렇게 여론몰이를 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같은 자를 행정부의 공무원으로 임명하거나 재판관 등으로 임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이른바 '코드인사'라며 마치 대통령의 부도덕한 행동인 양 취급을 한다. 국민들은 정치이념을 갖지 않은 사람을 올바른 정치 지도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정치이념이 없는 지도자는 정치인이 아니라 연예인이다. 국가의 모든 정책이 정치이념에 따라 두 갈래로, 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뚜렷한 이념적 지향이 없다면 어떻게 정책을 판단하는 것일까? 우리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로서 무뇌아를 원하는 것일까? 이런 국민들의 성향 때문에 정치인들도 어떤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자신들의 견해를 표명하기를 꺼려한다. 이념편향적으로 비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정치인들이 언론매체에 적극적으로 글을 기고하여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을 뚜렷하게 밝힌다고 한다. 대통령도 현직인 동안에도 언론에 글을 기고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이렇게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밝히지 않는 자는 정치인의 자질이 없다고 판단한다고 한다. 이렇듯 너무도 당연한 일이 우리에게는 금기시 되는 이유가 뭘까? 필연적으로 분단의 현실에서 온 것이라고 보인다. 우리도 해방 후에 극심한 좌우대립을 겪었다. 그리고 북한과의 체제경쟁 속에서 이념적으로 경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에게는 비율상으로 10%미만이어야 할 극우파가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머지 반의 80%는 우파가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극좌와 좌파가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로 보자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최소한 심정적으로는 이럴 확율이 높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스탠다드'로 봤을 때 정말 기형적인 구조인데 물론 사회가 점점 발전함에 따라 이 기형적인 구조도 점차 완화되고 있기는 하다. 차라리 극우파에서는 자신들의 정치적인 지향을 오히려 쉽게 밝히는 편이다. 그런 이념이 국민의 '심정적' 다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극우가 아닌 정치인들은 민주노동당의 정치인들을 제외하고 자신의 이념을 밝히기를 꺼린다. 가장 대표적으로 보자면 정동영을 들 수 있는데 나는 아직도 정동영의 정치적 지향이 어디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런 의사표현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념을 추단할 수 있는 행동도 전혀 안 하고 있다. 이 정치인이 정치에 입문한 후에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이다. 대부분의 대선 출마를 선언한 사람들이 같은 실정이다. 지금 우리가 뽑은 대통령에게 바로 이런 이념을 요구하지 않아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 이념을 밝히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이라크에 파병결정을 하고 한미FTA를 체결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정부의 책임자가 맞닥뜨리는 상황은 절대로 예상된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 책임자의 이념적 지향을 알아야 한다. 모든 정책은 이념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출할 책임자가 어떤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할 때 어떤 판단을 할 것인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저 막연히 기업가 출신이니까 경제를 윤택하게 해 주겠지라며 책임자를 선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사회의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다수결의 원칙을 제대로 운용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다수와 소수의 의견이 명확히 표명이 돼야 하고 그에 따라 대결을 하여야 한다. 표 대결을 벌이는 것은 악이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이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는 표 대결을 적극적으로 하여야 한다. 이런 의식이 있어야 서로 의견이 다름을 인정하고 관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우리는 하나이다 내지 갈등은 옳지않다라는 위선만이 존재한다면 지금처럼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요원할 것이다. 이런 위선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하는 요인이다. 다양성을 죽이는 결과가 된다.
다수결이 제대로 작동하는 다양성이 인정되는 사회는 이룩하기 어려운 사회가 아니다. 그저 우리의 선거에서의 한 표로 쉽게 이룩된다. 나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를 철저히 검증하고 나의 이익을 대변해 줄 이에게 투표하여 대표자로 선출하면 된다. 정치인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그에게 요구하면 된다. 유권자의 요구가 정치인을 만든다. 그에게 이념을 요구하자. 그럼 그가 이념을 밝힐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각 제도들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방법은 바로 우리가 다수와 소수의 대결구도를 명확하게 설정해 주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와 소수가 대결하는 것을 선으로 삼는 제도이지 절대로 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명심하면 된다. 국회의원, 헌재재판관 등이 자신의 이념을 속속들이 밝히는 그날까지 요구하고 또 요구하자. 그러면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도래한다.